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서 왕 (문단 편집) === 역사 속 아서 왕의 후보 === 아서 왕 자체를 실존 인물로 주장할 수 있을 만큼 '''"아서 왕과 뚜렷한 관련성을 가진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이다. 역사상 '''[[미스터리 관련 정보|아서 왕 혹은 그 모델이 되는 인물이 정말로 존재했는지도 분명하지 않으며]],''' 단순히 전설일 뿐이라며 많은 역사가들이 역사상의 아서 왕 및 그 모델의 존재를 부인한다. 그렇지만 직ㆍ간접적으로 아서 왕과 관련되어 있는 역사적 기록들 또한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상의 인물을 전설속의 아서 왕에 대응시키려는 이런저런 노력이 한동안은 있어져 왔다. 역사상의 아서 왕의 실체에 대한 설명 중에 유명한 것은 아서 왕 전설이 브리타니아에 파견된 [[사르마티아]] 중기병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중기병 자체가 '기사'의 이미지를 연상시킬 뿐 아니라 그들이 [[펜드래곤]]과 비슷한 용의 문양을 사용했다는 점, 땅에 칼을 꽂아놓는 관습이 있다는 점 등이 근거가 된다. 또한 사르마트족의 전설에는 영웅이 죽게 되자 그의 검을 바다에 던지는 이야기[* 심지어 두 번은 던지지 않고 던졌다고 속이려는 내용도 나온다.]나, 아서 왕의 '호수의 여인'을 연상시키는 '물의 여인'도 나온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사르마트족과 관련시킬 만한 전설은 '''초기 기록이 아닌 후대의 기록'''에 주로 나오며, 이는 [[켈트 신화]]에도 비슷한 내용이 많이 있으므로 굳이 사르마트와 관련시킬 필요가 없다는 반론이 있다. 그와 관련된 다른 유명한 설로는 '아서 왕 = [[로마]]의 군인 [[아르토리우스]]'설로, [[루키우스 아르토리우스 카스투스]](Lucius Artorius Castus)가 5,500명의 사르마트 기병을 이끌고 브리타니아 북부의 '하드리아누스의 성벽'을 수비한 것이 아서 왕 이야기의 시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름의 유사성과 함께 그의 깃발이 [[펜드래곤]]이라는 점 등이 근거로 제시되었다. 반론으로는 그는 [[로마 제국]]이 아직 강성하던 시기의 인물이라 시기가 맞지 않는다는 점, 그가 전설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그다지 눈에 띄는 활동을 한 적이 없다는 점, 그가 사르마트 기병을 지휘했다는 뚜렷한 증거도 없다는 점 등이 있다. 또 다른 학설로는 로마의 기록에 '브리튼의 왕(REX BRITANNICA, a king of Britons)'으로 등장하는 '리오타무스'가 있다. 리오타무스라는 말은 브리튼어로 위대한 왕을 의미하므로 본명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이 리오타무스는 로마의 요청으로 무려 12,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왔는데, 이는 이 시대에 브리튼의 분쟁에서 동원되는 병력을 크게 상회하는 것이다. 리오타무스는 색슨족과 맞서싸우는 입장에서 본토에서의 증원을 막기 위해서 로마와 협력하려고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리오타무스는 로마 관리의 배신 때문에 로마군과 합류하지 못하고 [[부르군트족]]과의 전투에서 패배했는데, 패배 후 리오타무스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브리타니아 열왕사]](Historia Regum Britanniae)>에서는 리오타무스가 퇴각한 방향에 [[아발론]]이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었다고 나오기는하지만 이 시대의 기록이 부족해 연구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신뢰하기는 어렵다. 이는 이 주장의 약점이기도 한데, 리오타무스가 존재했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알려진 바가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아서 왕과의 관련 여부는 둘째치고 우선 리오타무스가 누구인지부터 연구해야 할 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서 왕과는 다른 게, 아서 왕은 로마와 협력한 것이 아니라 로마군을 무찔렀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그 외, [[아서 왕 전설]]에서 아서 왕의 [[숙부]]로 나오는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가 있다. 그가 실존했으며 아서 왕의 모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이는 길다스의 기록에 있는 바돈산 전투가 [[몬머스의 제프리]]의 기록에는 바돈 산 전투가 아서 왕이 지휘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길다스의 기록에 의하면 색슨족 부대는 브리튼으로 너무 깊이 들어왔다가 함정에 빠져 바돈 산에서 포위섬멸되었다고 한다. 길다스는 바돈 산 전투의 지휘관이 누구인지 밝히지는 않았지만, 길다스의 다른 기록을 보면 이 당시의 군 지휘관은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인 듯하다. 물론 바돈 산의 전투는 벌어진 정확한 시기도, 바돈 산이 어디인지도, 그리고 싸운 것이 브리튼 인들인지 로마군인지조차 불분명하다. 하지만 최소한 색슨족이 브리튼인들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활동이 백년 동안 위축된 점은 많은 역사학자들이 사실일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반면, [[몬머스의 제프리]]는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가 [[우서 펜드래곤]]의 형이라고 기록했다. 이때문에 바돈산 전투를 치룬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가 곧 아서 왕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지만, 길다스의 기록을 검토한 학자들은 아우렐리아누스가 활동한 것은 바돈 전투보다 앞선 시대라고 보았다. 또한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우스는 길다스의 기록 이외 다른 곳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그가 실존했던 인물인지는 매우 불분명하다. 만약 그가 실존했다면 로마의 기록에도 나타날텐데 그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가설을 따른 작품이 [[ABE 전집]]에 포함된 영국 역사소설 '횃불을 들고'인데 이 작품에서는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와 그의 조카이자 기병대장인 새끼곰 '알토스' 두 사람이 아서 왕의 모델로 나온다. (해당 소설은 시공사에서 '횃불을 든 사람들'로 재발간되었다.)] 이 외에도 잉글랜드 북부의 브리튼 왕국의 왕이었던 우리엔 레게드(Urien Rheged)나 전설적인 북부 브리튼의 왕 코엘 헨(Coel Hen)[* 이 두 사람은 [[웨일즈]]의 시와 전설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왕들이다.], [[브리타니아]] 출신으로써 로마제국으로 출병하여 아서 왕 전설의 로마제국 정벌의 모티브가 됐다 여겨지는 대립황제들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마그누스 막시무스]][* [[웨일즈]] 전설에서의 로마로 출병하여 돌아오지 않았던 웨일즈왕 막센 올레디그의 모티브로 여겨지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3세]] 등도 섞였을 가능성이 제시되기도 했다. 또한 [[켈트 신화]]에서 발전해 나간 아서 왕 전설이 중세를 거치며 앵글로색슨족의 대영웅 [[알프레드 대왕]]을 모델로 재구성된 것이 아닌가 하는 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렇듯 아서 왕의 전설은 여러 시대, 여러 지역의 여러 민족의 설화와 역사적 기억들이 유입되어 섞여서 연상되는 인물이 너무 많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아서 왕은 [[로만 브리튼]]인으로 로마화된 켈트족들의 지도자이고, 기독교인이다. 당시 브리튼인들은 북유럽 다신교를 믿는 게르만족과 기독교를 믿지않는 로마화되지 않은 켈트족들과 대립하고 있었다. [[아서 왕 전설]]은 로마화된 켈트족의 신화로 [[켈트 신화]]의 바탕위에 [[로마 신화]]의 요소가 얻어진 [[기독교]]적 [[신화]]이기도 하다. 아서 왕의 모델 역시 로마화된 켈트족, 즉 [[브리튼인]]들의 장군에, 기독교도로써 로마군 출신자일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갈리아 전기가 쓰여질 무렵과 아서 왕이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 사이의 시간차, 골 지방과 영국의 기후 차이도 무시할 수 없다. 당대의 무장 상황을 고려한다면 로마군의 제식 갑옷인 [[로리카]] 하마타([[체인메일]])로 무장 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당시 시대를 생각하면 어떠한 가설을 따라도 지금의 상상화처럼 [[플레이트 아머]]를 두른 이미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선지 2000년대 이후 영화부터는 고증을 살려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하고 있지 않다. [[중세]]내내 아서 왕 전설은 각색되어 왔으며 아서 왕의 이미지는 [[브리튼]]의 민족 영웅에서 [[중세]] 영웅의 이미지로 탈바꿈되었다. [[아서 왕 전설]]의 시기와 영국 역사를 쭉 비교해 봤을 때, 실재했다면 여러 정황상으로 로마 지배시기가 끝나가던 때(5세기 후반~6세기 전반)가 가장 적절하며 그 시절에 실제로 영국을 통치했을 만한 강력한 군사지휘관의 증거가 여럿 나온다. 그로 인해 그의 정체가 사실 로마군에 복무한 퇴역 군인이며, 로마의 지배력이 약해지자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모아 [[앵글로색슨]]족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혹은 그 과정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가설이 힘을 얻기도 했다. 아서 왕에 대한 첫 번째 기록인 넨니우스(Nennius)의 기록에서는 그를 '왕'이 아닌 군 사령관(dux bellorum)으로 부르며, '브리튼의 왕들 편에서 싸웠다'고 서술하고 있기도 하다. [[엑스칼리버]] 전설의 경우 금속 제련 기술의 발달로 인해 품질 좋은 금속검을 대량으로 보유했던 것을 비유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으며, 그가 사망했을 때 호수로 유해를 보냈다는 전설의 경우, 북유럽에서 죽은 이들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비유하는 이야기가 많아 같은 맥락으로 취급했다. 그 가설을 따르며 진상을 추적해 나가던 다큐멘터리에서는 여러 기록들을 조사해 가다가 마침내 아서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소개하기도 했는데, 이는 [[헨리 2세]]의 사망 직후 [[글래스턴베리]]의 수도사들이 수도원 묘지에서 아서왕과 귀네비어 왕비의 무덤을 발견한 사건에 따른 것이다. 전설속 인물의 무덤이 어떻게 발견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배경은 다음과 같다. [[헨리 2세]]는 왕권의 정당성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정치에서 권력의 정당성을 위해 신화를 이용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아서 왕을 [[소설]]화하는데 주력했으며, 신이 선택한 사람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헨리 2세는 웨일스 국경에 자리한 [[글래스턴베리]] 수도원의 수도사들의 도움을 받아 [[아발론]]의 위치 추적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사실 [[신화]]의 대부분의 내용은 구전으로 돌던 전설의 모음집적 성격이 짙다. 그래서, 주류 학계에서는 전설속의 '''아서 왕이 정확히 어떤 인물을 모델로 했는지 가려내는 일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한다. 위에서 설명한 인물들도 죄다 물증이 없는 추측에 싸인 가설일 뿐이다. 참고로 아서 왕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당대가 아닌 9, 10세기 윤색된 역사서로서 존재하는 연대기에는 그저 무슨 무슨 전투에서만 싸웠다는 기록만 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dtz-JYGVv9c)]}}}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O65t92NY4Yg)]}}}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KZEveRvamyI)]}}} ||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아서 왕 전설의 고고학적 증거를 찾는 고고학자들이 소개되었다. 엑스칼리버의 정체를 거푸집에서 금속 검을 뽑는 것으로 추측하기도 하는 등 참고할만한 고고학적 연구가 많다. 다만 마지막 영상의 글래스턴베리 유해는 진짜가 아니라 나중에 사라진 것으로 재연극에서 유해를 연기한 소품일 뿐인데 진짜인 것처럼 썸네일 낚시를 하여 비판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